일본.

일본에 가는 것만이 나에게 마지막 희망이란걸 오늘 깨달았다.

갑자기 이상이 떠올랐다. 끈질기게 도일 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이상. 결국 도일에 성공하지만
그는 동경의 어느 병원에서 객사한다.

한국에서의 삶은 너무 불행했다. 어린 나이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정말 버거웠던 짐인 것 같다.
일본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참 잔인한 겨울이다. 서울은 너무 춥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교훈 - 지주형.

제7회 김진균 상 학술부문 수상 소감 (2012.2.11)


한국 신자유주의의 교훈: 자본과 국가의 독재를 넘어 경제적 의사결정의 민주화로


지주형


먼저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에 대해 쓴 미흡한 책에 과분한 상을 수여해 주신데 깊이 감사를 표합니다.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힘쓰신 김진균 선생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또한 모든 오류는 저의 책임이지만 이 책의 저술은 저 뿐만 아니라 책의 서문에서도 언급했던 여러 사람들과의 교류 덕택에 가능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 책의 저술 동기, 논지, 그리고 함의를 간략히 설명함으로써 수상 소감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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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할 수도 없고 진보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한겨레신문을 창간호부터 열독했으나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내가 가장 절실하게 문제로 느꼈던 것은 계급문제나 통일문제보다는 당시 대학생활에서 직접 부딪힌 지적 독단성의 문제였다. 예를 들면 학과 내 역사학회에서 읽은 책들에 들어 있는 내용은 선택적으로 취합된 증거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선배들은 이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믿고 있었고 다른 의견은 무시당했다. 이 학회를 그만 둔 후에 가입한 철학 동아리에서도 사정은 낫지 않았다.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이냐부터 그것에 대한 답까지 토론도 하기 전에 모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왜 사람들은 종종 어떤 지식이나 의견, 또는 입장을 가지거나 주장하는 것을 넘어 맹신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지식인과 비지식인(또는 보통사람, 대중)의 관계, 그리고 독단과 맹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먼저 엘리트/지식인과 비엘리트/보통사람의 분리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가와는 별도로 이미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현실로 존재한다. 전문지식, 학력, 사회적 지위 등을 갖춘 엘리트/지식인의 (심지어 때로는 근거도 별로 없는) 의견들은 종종 합리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는 대신 정책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세계를 침범하고 왜곡하는 폭력이 된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말이다. 전문지식의 발전은 생활세계로부터의 자율성과 상식과의 단절을 요구하나 그것은 동시에 지식의 현실 적합성을 떨어뜨리고 생활세계를 교란/왜곡하는 엘리트/지식인의 상징폭력을 심화시키는 딜레마가 있다. 


다음으로 나는 이러한 독단성과 맹신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지식이란 축적되기 위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만약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탐구의 영역이 지나치게 확장되고 깊이 있는 지식의 축적은 더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의 공유는 지식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한하고 심하게는 특정한 지식의 독단화와 맹신화를 낳을 위험성이 있다. 더구나 생활세계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보수성, 변화에의 저항, 독단적 믿음, 상식 등등이 오히려 지배적이다.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싫어한다. 이러한 태도는 삶을 안정시킬 수 있지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게 만들 뿐 아니라 사회의 변화, 발전, 진보를 어렵게 하는 딜레마가 있다. 혁신, 변화, 성찰성 등등은 예외적으로만 발생하며, 더구나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적어도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어쨌든 현실에 보다 가까운 정치적 환상[정치경제학]에 집착하는데 반해, 독일인은 ‘순수정신’[철학]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면서 19세기 중반 자본주의의 현실과 동떨어진 독일의 철학을 비판한 바 있다. 나도 처음에는 지식인과 독단성의 문제를 정치경제적 현실의 비판보다는 독일 이데올로기처럼 매우 추상적인 순수 사회이론을 통해 접근했다. 하지만 1997년의 IMF 위기의 충격으로 나는 보다 직접적인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무엇보다도 나는 내 자신의 전공이 사회학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꼈다. 도대체 IMF 위기는 왜 발생한 것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나는 이 질문에 전혀 답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고환율과 한국경제의 공황으로 인해 영국에서의 내 삶 또한 매우 궁핍해졌다. 이는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자본주의적 질서의 승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내가 바로 생활에서의 직접 경험으로부터 자본주의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나와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IMF 위기를 전후로 한 한국 자본주의의 변동 과정을 주제로 삼고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나 이 논문은 결과적으로 서구학계에서 보다 관심을 가질만한 사회이론적 관점에서  ‘학습(learning)’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정치경제와 사회변동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논문은 원래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엘리트/전문가의 독단성 및 전문지식에 대한 맹신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거의 담지 못하였다. 또한 궁핍한 영국에서의 생활로부터 갖게 된 (화폐적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계산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 또한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지구적 맥락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과 형성을 역사적으로 풍부히 파악하는데도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이뤄진 지구 정치경제학적 맥락과 역사적 사건을 보다 풍부하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IMF, 신자유주의 관료, 초국적 자본, 재벌 등이 무엇을 하였는지 드러내는 동시에 엘리트/전문가의 독단과 신자유주의적 계산방식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키려고 하였다. 물론 이 책도 이 모든 문제의식과 주제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였지만 이 책이 명시적으로 주장하거나 암묵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바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유주의 사회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적 제도와 관행을 통해 확산되는 화폐-금융지향적인 신자유주의적 계산 방식의 지배이다. 신자유주의는 재산권과 상품화의 확대 등을 통해 소유자의 권리를 극대화하려고 하며, 이를 위해 자산의 분할 거래, 모든 것의 상품화, 이익의 즉각적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금융화를 확대시킨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는 그 어떤 자본주의 시스템보다도 모든 것을 화폐적 가치의 관점에서 취급하고 획일화시킨다. 화폐적 가치 이외의 다른 가치들, 예를 들면 사용가치, 미학적 가치, 도덕적 가치, 사회적 연대의 가치 등등 수많은 다른 다양한 가치들은 주변화된다. 신자유주의는 사회학자 짐멜이 주장했듯이 인간의 문화를 화폐라는 단일한 가치로 수평화시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계산’ 외에는 아무런 끈도 남겨 놓지 않”는다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인간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환상 속에 몰아넣어 생활세계를 왜곡하고 공동체의 해체를 조장한다.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한국도 IMF 위기 이후 폭력적인 금융주도 구조조정 과정과 금융화, 유연화 등을 통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계산의 방식이 지배적이 되고 그 결과 사회의 여러 부분이 물질적으로 피폐해지고 정신적으로도 황폐화되었다.


둘째, 이러한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기원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복합적이다.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한 사회의 변화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결과이므로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전략과 대응은 이러한 지구적,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해야 한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개발국가의 한계와 해체, 그리고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대응과 이에 대한 사회적 저항 사이의 투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고, 여기에는 미국의 개입과 한국 신자유주의 관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미국은 월스트리트와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시장개방과 자유화를 강력히 요구했으며 마침 터진 아시아 금융위기를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미국이 사실상 통제하는 IMF 이외의 대안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미적거리던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을 일거에 달성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 유학파 시장주의 관료들에 의해 1979년에 처음 시도된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관치경제에 대한 비판의 확산과 더불어 정부 안팎에서 점점 많은 지지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IMF체제를 재벌, 노동, 경제부처의 저항으로 좌절되었던 기업, 노동, 금융 개혁을 관철시키는데 사용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자본주의는 초국적 자본과 재벌의 자본축적 공간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셋째,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정치적, 사회적 투쟁 과정을 통해 폭력적으로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학습을 통해서 배우고 발전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구조조정, 즉 잉여자본과 잉여노동의 파괴를 통한 학습과 발전의 방식은 폭력적이다. 자본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폭력적으로 도태되고 그러한 관점에 부합하는 특정한 종류의 경험과 교훈만을 학습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 또한 역사적으로 특수한 금융적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폭력적으로 도태시키고 산업, 노동 또는 살림살이 보다는 단기적인 화폐 수익성이 최고라는 교훈을 주입시키는데 이는 위기 이후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이후 한계에 도달한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방식을 둘러싼 국제적, 국내적 수준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은 1997년 위기로 절정에 달하였고 그 결과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관점에서 위기를 특수하게 규정하고 특수한 방식으로 관리하여 위기효과와 위기관리 비용을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위기에 대한 경험과 학습의 지평이 제한되었고 신자유주의적 기준에 맞지 않는 집단과 실천들은 도태되거나 약화되었다. 재벌은 처음에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저항하고 그 중 일부는 사라지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이후의 위기극복 과정을 통해 오히려 그 권력과 축적 역량이 강화되었고 초국적 자본은 한국의 금융시장을 지배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가고 있다. 반면 노동은 대규모 실업과 노동시장 유연화를 거치면서 그 영향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그 결과 국가도 산업도 단기적인 화폐적 수익성의 관점에서 운영되게 되었고 노동운동은 급격히 보수화되었으며 사회 또한 경쟁주의적으로 변화하였다.


넷째, 이러한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전환과정은 경제적 의사결정에서의 독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의사결정, 즉 경제적 자원 배분(투자결정, 생산과정, 생산물의 배분 등)을 지배하는 것은 경쟁과 가격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조절된다는 시장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이다. 신자유주의 지구정치경제에서는 미 재무부, 초국적 자본, IMF와 세계은행 등이 주도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 그리고 신자유주의 한국에서는 재벌, 초국적 자본, 경제관료와 지식엘리트들로 구성된 과두권력이 이 과정을 지배한다.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자본주의라든가 시장경제라고 규정하지 않고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지만 최근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복지나 ‘경제 민주화’도 사실은 이들이 경제적 의사결정에 행사하는 권력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반면 노동자, 실업자, 자영업자, 중소기업 등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질서의 밑바탕이 되는 재산권이 가지는 권력 외에도 그러한 재산권을 확대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른바 경제를 안다는 기업인이나 전문가들만이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자격이 있다는 전문가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다섯째,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복합적 기원, 폭력적 형성과정, 그리고 그것이 심화시킨 경제적 의사결정의 독과점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실은 그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바대로 자연적인 시장적 질서가 아니라 매우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질서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또 다른 사회적인 그러나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고 화폐적 가치보다 우위에 서도록 해야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금융지향적 계산방식을 지양하고, 화폐적 가치와 그것을 추구하는 독단적 지식이 생활세계를 통제하는 대신 다른 지식과 가치들이 화폐적 가치와 지식을 통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습의 기반이 되는 경험적 지평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사회 변화와 발전의 폭력성이 제거되거나 최소화되게끔 경제적 의사결정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이는 경제정책이나 경제적 자원배분을 더 이상 정치와 민주주의의 영역에서 제외하거나 자본, 관료, 지식인의 독재에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배타적 의사결정이 가져오는 파국적 경제위기,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그리곤 공동체의 해체를 볼 때 경제적 의사결정을 민주적 의사결정에서 예외로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할 수 없다. 끝으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이 보여준 한국 신자유주의의 복합적 기원, 폭력적 형성, 경제적 의사결정의 독과점은 오늘날 한국을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크게 규정하고 있는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몇 가지 정책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신자유주의가 역사적으로 그 뿌리가 매우 깊고 지구적 구조 속에서 유지되는 것인 동시에 경제적 의사결정의 폭력적인 독과점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극복은 작게는 국가, 정치 그리고 폭넓은 사회경제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 크게는 전 지구적 구조 속에서의 한국 정치경제의 위치 재설정, 그리고 나아가 지구적 구조의 전환을 요구한다.



- 지주형씨 같은 훌륭한 지식인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서동진 선생님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들도 많이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나도 책을 더 정교하게 읽고 비판할 점을 찾아봐야겠다. 물론 책을 읽고 비판점을 찾는 것보다, 그 책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란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판할 점을 조목조목 깨알 같이 찾아내는 것이 저자에게도 더 도움 되는 길일 것이다. 어쨌든 멀리서라도 축하드린다.


나이 듦.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아래에 옮겨놓은 우석훈의 글을 읽고, 예전의 나였다면 노발대발 했을 것이다. 지식인이 할 소리가 아니라고. 나약해 빠졌다고.
그러나 지금, 우석훈의 미래가 나의 미래와 같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석훈의 글이 너무 서글프게 느껴진다. 기운 빠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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